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입동을 넘은 계절은 어느덧 소설에 이르렀다. 점점 두꺼워져 가는 옷가지들과 달리, 점차 몸을 가볍게 만드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냉방이 아닌 난방으로 바뀌는 지하철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또 겨울이 오고 있음을 느낀다.

일전에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보고 느끼며,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는 걸 체감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하철 좌석에 앉았을 때 올라오는 히터 바람에 비몽사몽 졸린 몸을 부여잡고 가

는 게 내 일상이라니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몸은 움츠러들지만, 다시 봄이 올 걸 알기에 체력을 비축해두는 일을 더 열심히 한다. 하기 싫지만, 꾸준히 해오는 일. 오늘 밤에도 ‘죽도록 하기 싫은 달리기’를 하기 위해 넥워머와 장갑을 끼고 달리러 나간다.

사실 난 체육 활동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남들과 달리 신체 능력이 평균 이하라 그렇다. 겉보기에는 날렵한 몸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간혹 달리기가 빠를 거 같다는 평을 내리곤 하지만 정말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기대가 크다면 실망도 큰 법. 사람들은 내가 겸손해서 달리기를 못 한다고 말한 줄 알고, 기어코 체육 대회의 꽃인 계주에 나를 내던졌고, 나에 대한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뭐야 진짜 못 뛰네?"

"아니, 내가 못 뛴다고 말했잖아요."

내겐 아직도 그만큼 창피한 기억이 없다. 그 한 번의 창피함 때문에 다신 달리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체육 활동을 더욱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체육 시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싫었다. 공을 자유롭게 가지고 노는 것도, 뜀틀을 넘는 일도 좋았는데 이게 평가가 되는 순간 위축되었다. 또래보다 신체 능력이 동적인 스포츠보다 정적인 스포츠에 더 알맞게 발달했던 나는 유연성이 요구되는 것들만 자신 있게 나서서 했고(그 당시에 다리 찢기가 좌우, 상하로 되었지만, 지금은 전혀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영 별로였다.

신체 능력은 달리지만, 평가 점수는 잘 받고 싶었기에 체육 시간만 되면 수행평가 준비를 남들보다 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고난 이들의 점수를 단 한 번도 뛰어넘진 못했다. 달린 능력을 노력으로 받을 수 있는 최대 점수는 85 ~ 90 사이였다.

누구보다 노력하는 일 자체는 체육 선생님 눈에 밟혔는지 체육 선생님은 교과 세부 특기사항에 이렇게 적어주셨다.

'신체 능력은 다소 부족하나, 노력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이 돋보임'

누군가 내가 노력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위로가 된 순간이었다. 살다 보면, 나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난 왜 저 정도를 못 할까?'하며 자신을 질책하게 되고 열등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잠식하기 시작한다.

그때의 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보다 잘하는 이들을 롤모델로 삼고 하나둘씩 방법에 관해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공을 잘 던질 수 있는지. 내가 귀찮게 군다고 생각해서, 잘 가르쳐주지 않으면 선생님을 찾아가기도 했다. 단순히 점수를 잘 받는 것보다 '나도 노력하면 일정 수준까지는 갈 수 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였다.

신체 능력의 부족에서 기인한 열등감은 주변 사람들이 누구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성장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 내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정은 쓰기 나름이다. 개똥도 약에 쓰이듯 말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토록 싫어하던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지만 달리기를 하고 난 후에야 안 사실은 난 사실 '단거리 러너'가 아니라 '장거리 러너'였다. 내게 빠른 달리기를 할 수 있는 탄력은 주지 않으셨지만, 더욱더 오래 뛸 심폐지구력과 노력을 주셨나보다.

다시는 뛰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도 이리 쉽게 사라졌다. 정말 뛰지 않았더라면, 내가 '장거리'형 러너인지도 몰랐을 일이다. 삶이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삶의 불순물을 제거해준다는 류시화 시인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나의 달리기 경험이 그동안의 불순물을 모조리 씻어내 주었다.

이따금씩 나의 꾸준한 달리기를 굉장히 부럽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연락이 온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뛰는지, 거리랑 페이스가 어찌 그리 성장하는지. 그러면 답장은 한결같다. 나도 할 수 있는 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아무 생각없이 내 몸에 집중하다보니 꾸준하게 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다른 상념들에 갇혀 머릿속만 빙빙 돌아다니다, 달리기할 때면 그동안 잊고 있던 내 팔, 다리에 관심을 쏟게 된다. 무관심으로 이어가다 아플 때만 찾는 내 몸에서, 건강하게 움직이는 내 몸을 바라보면 사뭇 다르다. 아, 삶은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통해 이어 나가는 거구나 하고.

코끝이 시려오지만, 시려오는 코끝 덕분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잊고 있었던 내 몸에 대한 감각을 겨울이라는 계절이 더 크게 일깨워준다. 한껏 움츠러든 몸도, 달리고 나면 이내 기지개를 켠다. 그렇게 이번에 겨울도 달리며, 겨울의 갈피를 잡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