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밑 나무의 그림자만이 고요히 흐르던 저녁, 피부에 닿는 온도가 적당하여 적막의 틈을 걸으며 여러 생각을 적었다. 푸름이 꺾여가는 입동 앞에서, 초록이 바랜 자리에 다소 무거워진 색들이 눈에 띄던 날이었다.

풍경이 가난해지는 이 맘 즈음의 나는 꼭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동면을 준비하는 동물들은 움직임이 느릿해지고, 많은 가지들은 썩은 잎을 벗겨내는데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은 어떤 취약함을 지니게 되나. 겨울만 오면 마음 밑동으로 가라앉는 무거운 생각들이 그것일까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보폭을 늦추고 느린 노래를 찾아 듣는다. 겨울이 가을을 쓸고 가는 소리가 들리는 계절의 경계에서, 계절과 함께 앙상해질지 모를 마음을 감싸는 나만의 방식이다.

나의 산책은 늘 집 앞의 정자에서 생각을 갈무리 지으며 마무리된다. 그 앞에는 작지만 꼿꼿한 나무가 몇 그루 세워져 있는데 계절마다 달라지는 나무의 모양들은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는지 선명히 느끼게 해준다.

나무의 색들을 보면 나무가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 시간은 나에게도 같기에 나의 잎도 생각하게 된다. 현재 나의 잎은 어떤 색으로 익어가고 있을까.

어떤 날엔 곁에 계속 머물러 줄 것만 같던 찬연함들이 가늘게 흔들린다. 한기가 서려 차갑게 부는 바람에 훌훌 떠나가는 잎사귀는 무성한 연둣빛으로 찬란하던 시기를 무색하게 한다.

또 어떤 날엔 썩어 떨어진 어제의 못난 잎들이 현재 나의 그림자를 가린다. 수북이 쌓인 지난 것들이 곁을 감싸고 허전해진 내 모습은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머지않아 뿌리 깊은 양분이 되고 곧이어 싱그러운 이파리들도 새롭게 돋아날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 나무의 생은 어쩌면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같은 계절을 반복하는 삶일지라도 지나온 시간들이 양분이 되어 한 뼘씩 위로 뻗어가고 있는 거라고. 비슷하고도 다른 날들을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네 개의 계절들을 맴도는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나선형으로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