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가을의 날씨가 지나갈 무렵, 찬 바람이 솔솔 불어올 때가 되면 슬슬 갈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은 찬 바람 불 때 핫초코 미떼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자주 갔던 곳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갈 수 있으려나 할 때마다 상황이 심각하게 바뀌는 바람에, 올해는 아직 함께 목욕탕을 가지 못했다.

목욕탕을 가는 원론적인 이유야 몸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지만 나는 목욕탕에 가는 걸 아버지와의 대화를 위해서 간다고 느꼈다. 목욕탕을 가면 함께 나누는 대화는 사우나에서 이뤄진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사우나(Sauna)는 핀란드어로, 핀란드 전통 방식의 목욕 혹은 목욕탕을 의미한다고 한다.

뜨거운 공기로 가득 찬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 벌거벗고 나누는 대화는 그 무엇보다 솔직했다. 사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더 많았지만, 나는 이때만큼 아버지의 많은 말들을 들을 기회가 없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 이야기, 군대 이야기. 때로는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한 움큼 다시 꺼내곤 했지만 난 그게 싫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그만큼 좋았거나 인상 깊었기에 다시 말씀하시는 거겠지. 바깥의 차가운 바람이 솔솔 부는 날씨와 달리, 몇 번 반복했던 이야기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다.

두 남정네의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면, ‘아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하고 문을 박차고 나온다. 매번 같이 들어가서 먼저 나오는 건 나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가는데 뜨거운 공기를 매번 버티지 못하고 나온다. 아버지는 찬물을 끼얹고 있는 나를 보며 웃으신다. 그거 하나 못 버티냐면서. 사우나 버티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핀잔을 주면, 그저 웃음으로 화답해주신다. 티격태격하던 두 남정네는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목욕을 마무리한다.

뜨끈하게 데워진 몸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묘한 침묵이 이뤄진다. 말을 많이 하셨던 아버지는 잠시 목을 쉬게 하고, 많이 들었던 나는 잠시 귀를 쉬게 해준다. 솔솔 들어오는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 안에는 따스한 온기가 가득하다. 귀에는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들이 계속 맴돌고, 머릿속에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있다. 그래도 그런 고민이 오래가진 않는다. 일단 따뜻해진 몸의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있다 보면,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따뜻하면 좋은 거지 하고선 단순한 생각만 머리에 남는다.

슬슬 차가워진 가을바람은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린다. 이번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기 위해, 아버지와 꼭 목욕탕을 가야지.